2000년대 초반, 남자 테니스는 거대한 세대 전환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 뤼튼 휴잇(Lleyton Hewitt)과 로저 페더러(Roger Federer), 두 전혀 다른 스타일의 선수가 있었습니다.
한 명은 포기하지 않는 정신과 강철 같은 수비로 경기를 설계하는 전략가였고,
다른 한 명은 정교함과 우아함, 천재적 완성도로 상대의 흐름 자체를 지워버리는 예술가였습니다.
이 둘이 맞붙었던 27회의 경기,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장면들은 단순한 승패 이상으로,
테니스가 보여줄 수 있는 인간 드라마 그 자체였습니다.
🎾 초반 우세 : 뤼튼 휴잇의 불굴의 의지
처음 만났던 1999년, 당시 18세의 페더러는 아직 투어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신예였고,
휴잇은 이미 세계 주니어 랭킹 1위를 거쳐 ATP 투어에서 무서운 상승세를 보이던 유망주였습니다.
그리고 이 첫 만남 이후, 2003년까지 휴잇은 페더러를 상대로 7승 2패라는 압도적인 전적을 기록했습니다.
그 시기, 페더러는 아직 ‘완성형’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위기에서의 대처, 멘탈, 포인트 조율에서 휴잇의 끈질김에 자주 흔들렸고,
포인트마다 외치는 “Come on!” 소리에 리듬을 잃기도 했습니다.
휴잇은 절대 지치지 않았습니다.
어떤 각도든, 어떤 위치든 공을 되받아냈고, 상대가 먼저 무너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이 시기 페더러와의 승부는 그가 리턴과 수비만으로 ‘전 세계 1위’까지 오른 비결을 증명해주었습니다.
🎾 2004년의 전환점 : 경기를 지배하는 로저 페더러
하지만 2004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로저 페더러는 2003년 윔블던에서 첫 그랜드슬램 우승을 거머쥐며 자신감을 얻었고,
2004년부터는 완전히 다른 선수가 되어 코트에 들어섰습니다.
서브 앤 발리, 슬라이스 백핸드, 포핸드의 깊이와 각도,
모든 기술은 완성 단계에 올라 있었고, 무엇보다 심리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생겼습니다.
그 상징적인 장면이 바로 2004 US 오픈 결승전입니다.
이날, 휴잇은 무려 6-0, 7-6(7-3), 6-0으로 완패했습니다.
자신의 커리어 중 최초로 한 경기에서 두 번이나 0-6을 기록한 날이었습니다.
무엇보다 2세트 타이브레이크까지 사력을 다해 버틴 휴잇의 모습은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세트에서 다시 0-6이란 스코어가 나온 것은,
페더러가 단지 기술로만 경기를 이긴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공간마저 점령했다는 신호였습니다.
이 경기를 기점으로 페더러는 휴잇에게 15경기 연속 승리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 스타일의 대조 : 흐름을 설계한 자 vs 흐름을 지운 자
휴잇은 흐름을 만드는 선수였습니다.
긴 랠리, 강한 리턴, 상대를 지치게 만드는 싸움으로 경기를 설계했습니다.
하지만 페더러는 흐름 자체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응수했습니다.
서브로 간결하게 시작하고, 포핸드로 짧은 전개, 깊은 코너를 찌르며 휴잇의 설계를 무너뜨렸습니다.
휴잇이 10개의 포인트로 설계한 흐름을, 페더러는 3번의 볼 터치로 무력화시켰습니다.
그것이 기술력의 차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경기 철학의 차이, 그리고 멘탈의 균열을 유도하는 전략이었습니다.
휴잇이 말한 바 있습니다.
“페더러와 경기하는 건, 가끔은 벽을 상대로 대화하는 것과 같다. 그 벽은 감정도 없고, 약점도 없다.”
🎾 인간적 장면들 : 패자와 승자의 따뜻한 교차
하지만 이 맞대결이 단지 냉혹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두 선수는 서로를 존중했습니다.
휴잇은 늘 페더러를 "내가 만난 선수 중 가장 완벽한 사람 중 하나"라고 했고,
페더러도 휴잇을 “정신적으로 가장 힘든 상대 중 한 명”이라 평가했습니다.
2016년, 휴잇이 은퇴할 무렵.
페더러는 트위터를 통해
"내 청춘의 한 페이지, 그 중심엔 늘 휴잇이 있었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그 말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가장 힘들었던 시절 자신을 성장시킨 강한 벽을 향한 헌사였습니다.
🎾 결론 : 승자는 기록에 남지만, 싸움은 기억에 남는다
페더러는 총 27번의 맞대결 중 18번을 승리하며 상대전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했습니다.
특히 2004년 이후 전성기의 연승 행진은 테니스 역사에서 보기 드문 일방적 흐름이었고,
두 선수의 스타일 격차와 전략의 진화를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하지만 테니스를 사랑하는 팬들이 이 대결을 기억하는 이유는
단지 승패 때문이 아닙니다.
한 사람은 모든 수단으로 흐름을 만들고,
다른 사람은 모든 수단으로 흐름을 부수는,
그 치열한 두 철학의 충돌.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존중, 끈기, 인간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팬들은 말합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휴잇 vs 페더러를 또 보고 싶다."
2004 US OPEN Final 하이라이트
https://youtu.be/u66gIG-wMT0?si=0Tq9d2_tSZa8qnOY